단편

잠자리와 고양이-3

graybird 2017. 4. 2. 09:38

복잡한 내 심경에 아랑곳 없이 <설산>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이른 저녁부터 밀려드는 손님으로 모든 테이블은 가득차 있었다. 바에도 역시 빈자리가 없었다.

이미 영업이 시작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유리 잔을 두 개나 깨뜨렸다.

평소 같았으면 바에 앉아 홀을 힐끔거리며 여자 손님이나 다찌들 품평을 지껄였을 실장도 바쁘게 뛰어 다니며 일을 도왔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아파트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들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했다.

중년의 일본인 남자가 그녀의 몸을 탐욕스럽게 더듬는 동안 내키지 않는 표정조차도 짓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한두 주를 보낼 생각을 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자의 영역이고 시간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의식을 헤집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냉정하게 정리해야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괴로워 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선택한 길이고 그녀의 삶이다.

나는 그저 우연히 끼어들어 뜻하지 않은 혜택을 누려 온 입장이다.

마치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지금에 와서는 나의 빼앗긴 권리라도 되는양 괴로워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저 기다렸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그 일상속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껏 그녀와 함께 지내온 기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함께 생활 하는 사이면서도 아직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괴로워 할 필요 없다.

저녁내내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마침내 초저녁 부터 가득 차 있던 테이블도 듬성 듬성 빈 자리가 보이기 시작 할 무렵 조금씩 머릿속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저녁 내내 밀려 있던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실장도 한숨을 돌리려 커피를 타서 바 한 구석에 마련해 놓은 접이식 의자를 꺼내 앉았다.

 

... 어떤 자식인가 궁금했는데 드디어 보는구만.”

누구 말씀 하시는거에요?”

거 왜 걔있잖아. 사장 와이프네 다찌 애들 중 에이스였다는. 너랑 친한 애.”

 

<설산>의 직원들 누구도 아직 그날의 일을 모른다. 당연히 그녀와 나와의 관계도 그들이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그녀를 여전히 이따금씩 놀러오는 나와 친한 손님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까 남자랑 들어왔는데 그 놈이 틀림 없어. 남자를 데리고 온 건 은퇴 이후 첨이니까. 역시 딴짓 안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홀 쪽으로 나가보았다.

조금은 한가해 졌다고는 하지만 몇 번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그녀와 마주앉은 상태로 내 쪽에서는 등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대 편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하필 여길 온거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눈짓으로 그를 가리켰다. 아마도 그가 여기에 오자고 했던 모양이었다.

저녁 내내 자신을 타이르며 겨우 마음을 좀 가라 앉히고 있던 상태에서 이런 상황은 영 달갑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저 하는 동안 분한 감정이 다시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냥 다 팽개치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바를 찾는 손님은 없었다. 때문에 실장은 어디론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싱크대 아래에 쪼그려 앉아 줄담배를 피워대다 마침내 숨겨둔 위스키 를 꺼내어 두 잔을 거푸 들이켰다.

목줄기를 타고 넘어간 후끈한 알콜 기운이 혈관을 타고 번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누군가 바 너머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시선도 느껴졌다. 그녀였다.

 

뭐해? 쪼그려 앉아서. 근무중에 술마시는거야?”

 

어느정도 취기가 오른 음성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홀 쪽을 살폈다. 한 사내가 통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여길 뭐하러 왔어?”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짜증섞인 말투는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오자고 한 거 아니야. 저 사람이 원래 여길 좋아해. 나를 여기서 만났거든.”

아니 가게 말고. 여길 왜 왔냐고. 저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 온 사내가 그녀를 불렀다.

일본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는 그는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훤칠한 키에 적당히 달라붙는 수트를 걸친 당당한 체격.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 아래로 굵은 선을 가진 남자다운 눈매와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현역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미남자였다. 그가 마흔 여덟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며 뭔가를 말하는 목소리에도 중후한 울림이 있었다.

 

친한 사이냐고 묻길래 고향에서 알던 동생이라고 했어.”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일본어 대화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뭐라고 하건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는 않을테고 그와 나는 말도 통하지 않으니.

단지 내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나는 지금껏 그를 중년의 배불뚝이 남자로 상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돈을 모으는 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외모를 가꾸는 일도 신경쓰지 않고 살다 탈모가 찾아온 대머리 일지도 모른다. 여자의 청춘을 대여하는 남자란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돈을 써서라도 들킬 염려가 없는 한국인 애인을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나 당연히 그런 모습으로 그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가 가진 부를 제외하고도 나로써는 상대조차도 안되는 남자였다.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차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보였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사람대해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걸까. 어째서 내가 모든 것을 멋대로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내가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그냥 둔 것일까. 그녀에게 화가나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더욱 화가 나는 사실은 악수를 건네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음에 보자는듯한 간단한 일본어 인사를 건네고 그녀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보면서 나는 나이트클럽에서의 그날 밤 보다 더 비참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테이지에서는 사회자가 그를 찾고 있었다. 다음곡을 부를 차례였나보다. 그가 무대에 오르는동안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홀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익숙한 곡의 전주가 흐르고 있었다. 일본 곡이었고 나 역시도 이 곳에서 일하면서 좋아하게 된 곡. 나가부치 쯔요시의 톤보(とんぼ)였다.

함께 상경한 친구들과 밤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무렵 나는 여전히 꿈을꾸고 있었고 비록 세상의 그늘 속에서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살고 싶었다.

<설산>에서 일하면서 여러 일본 노래들을 접하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당시의 내 심경과 잘 어울리는 노랫말이어서 좋아하기 시작했던 곡이었다.

그리고 마음아프게도 그 남자는 그 곡을 정말 멋지다는 감탄이 나올만큼 잘 불렀다. 나는 나가부치 쯔요시의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잠깐동안 어쩌면 그가 그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했다. 그럴리야 없었겠지만.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에게로 향하고 있는 그녀의,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었다.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엔 나를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 단연코 가장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설명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건 누구나 보게 된다면 한 번에 그런 느낌이 들 것이라는 거다.

그들은 계약 관계로 맺어진 일본인 물주와 한국인 현지처의 사이가 아니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관계로 유지 되는 것은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 관해 나에게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녀의 직업이 다찌였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또한 많은 여자들을 설레게 할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그녀에게 무엇일까.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술에 취해 흥에 취해 잠깐의 일탈의 수단으로 하룻밤 정도였다면 모를까.

어째서 저런 남자가 마련해 준 공간으로 나를 들인 것일까. 그의 노래는 끝이 났지만 나의 의문은 끝없이 초라해진 내 안을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석달이란 시간을 그녀와 함께 살았지만 그녀에게 나 자신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할 지라도 나는 이제 그녀의 아파트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이곳에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내가 그 밤 그 택시에 타는게 아니었다. 아니 에초에 <설산>이 아닌 다른 업소를 갔었어야 했다. 무수한 후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들은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돌아갔고 마침내 영업시간도 끝났다.

그 남자를 떠올리면 밀려오곤 하던 분한 감정도 어느덧 사라졌다. 그 자리로 다시 밀려온 패배감과 아쉬움은 이밤 내내 나를 괴롭힐 것이다.

 

-요즘 뭐하냐?

-나야 뭐 애들 일 마칠 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비디오나 보면서 빈둥거리다 애들 돌아오면 소주나 한 잔 얻어마시고. 그리고 또 자고. 그게 다지.

-아직 자리 못 구했냐?

-몇 군데 소개가 들어오긴 했는데 정작 가보면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지배인이 맘에 안들더라고.

-내가 하는 일 한번 해 볼래?

-? 너는 뭐하려고?

-그건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단은 여길 그만 둬야겠어. 고향에 내려갈까 싶기도 하고.

-그래? 니 자리를 소개시켜준다면야 나야 땡큐지.

 

전화를 끊고 나는 가게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였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새벽내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다 그녀의 아파트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섹스 파트너 그 이상이긴 했지만 연인까지는 이를 수 없었던 사이. 그리고 누나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는 존재였다.

만일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녀와 그런 식의 관계를 맺었을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거운 머리로 밤새 걸었던 탓에 어딘가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아파트단지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집은 제법 떨어진 동이었으니 혹시나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나는 그냥 화단 경계석에 주저 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피로와 고독 그리고 약간의 한기에 시려오는 손. 최적의 담배 맛을 느낄 수 있는 컨디션이었다. 이 쓰고 매운 연기를 달게 들이 마실 수 있는 현실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이제는 이 지독한 괴로움을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답을 얻지 못했던 의문들은 길게 내 뿜는 담배 연기에 뒤섞여 희뿌옇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화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무엇인가가 불쑥 기어 나왔다.

고양이 한 마리였다. 노란색에 좀더 짙은 노란색 줄무늬를 가진 토실토실한 살이 오른 녀석이었다.

사람을 봐도 놀라지도 않고 느긋한 걸음을 옮겨 내 앞에 앉더니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내가 만만해 보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인지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볼뿐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제 갈길을 가지도 않았다.

 

뭘 보냐? 너도 내가 한심해 보여?”

 

내가 던진 말에 대답처럼 냐옹 소리를 내는 모습이 우스웠다. 피식 웃고 있는 내게 녀석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발치에 뺨을 부비적 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너도 나 유혹하는거야?”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난생 처음 내게 친근하게 구는 고양이를 처음 본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녀석의 턱을 긁어주고 있었고 이 붙임성 좋은 고양이는 온 몸을 뒹굴뒹굴 굴리며 그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고 이녀석 한참 찾았네. 어쩌자고 여기까지 나왔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돌아보니 트레이닝복 위에 오리털 파카를 걸친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조금전까지 내 발치에서 뒹굴 거리던 고양이 녀석은 애교가 잔뜩 섞인 울음소리를 내며 재빨리 로 쪼르르 달려가 그 여자의 다리에 온 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네 고양이에요?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네요.”

모르겠네요. 우리고양이라고 말해도 될런지. 내가 키우긴 하지만.”

 

그건 또 무슨 의미일까. 키우는데 내 고양이가 아니라니. 중년 여성은고양이를 안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집이 1층인데 하루는 글쎄 이녀석이 문이 열린틈으로 우리집 베란다에 들어와있지 뭐에요. 그런데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녀석이 붙임성이 얼마나 좋은지 갖은 애교란 애교는 다 부리면서 좀체 나가질 않는거에요. 나는 애가 없어서 사실 동물들을 너무 좋아하지만 우리 남편은 털이 날린다는 이유로 싫어하거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주말 부부라 평일에는 베란다에서 지내게 하고 남편이 와 있는 동안에는 밖에다 내놓는 수 밖에 없죠. 그러니 우리 고양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겠네요. 우울했는데 그 녀석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요? 이녀석이 그런 기특한 면이 있긴 해요. 워낙에 애교가 많고 사람을 좋아하니까. 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이녀석한테 많은 위로를 받곤 해요.”

 

중년 여성은 나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고는 고양이를 안고 돌아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는 다시 터벅 터벅 걷기 시작 했다. 오늘 저녁은 <설산>에 소개 시켜 줄 친구의 자취방으로 일단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일본 곡이었다. 나가부치 쯔요시의 톤보라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