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각들

늙음에 대한 보고서

graybird 2017. 8. 17. 10:29
서울의 모 은행 지점에 경비원으로 있던 어느 날이었다.
영감님 한 분이 중요한 일로 지점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지점장실로 안내해 주었고 몇 분 후 지점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그가 지점장을 찾아 온 까닭은 아직 노령연금이 나오려면 보름이나 남았는데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중 제일 높은 분이니 자신을 조금 도와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다.
연금이 나오는 날 꼭 갚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했다.
그가 불쌍했던 것인지 아니면 귀찮아서 빨리 보내고싶었던 것인지...어쨌거나 지점장은 그의 손에 5만원을 쥐어주었다.
그의 곤궁을 일시적으로 해소시켜준 지점장의 방식은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감님은 그 돈이 다 떨어진 며칠 후 또 다시 지점장을 찾아왔고 지점장은 그를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창구 직원들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차라리 동사무소를 찾아가셔서 도움을 청해보는게 어떻겠냐는 말로 그를 달래어 일단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난 후 세 번 째 방문에서 그는 나에게 들어서자마자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도움도 못주는 동사무소 같은 곳에 찾아가라고 한 덕에 헛걸음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지점장을 찾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안갚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돈이 많은 곳에서 부자들에게는 턱턱 돈을 빌려주면서 왜 자신의 어려움은 외면하냐는 것이었다.

-영감님...동사무소에도 가보셨잖아요. 돈이 많아도 우리 지점보다 나라가 더 많겠죠. 나라에서도 어찌 못하는걸 우리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의 설득도 그를 납득시키진 못했다.
이제 그는 숫제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달래고 있는 나에게마저 채권자처럼 굴기시작했고, 나는 결국 그에게 경찰을 부르겠다는 으름장을 놓는것으로 그의 소란을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돈이 없다고? 저번 달 25일에 들어온게 있을건데...
-할머니 그건 말일 날 다 찾아가셨잖아요. 지금은 잔액이 하나도 없어요.
-그럼 이를 우터해야하나...내가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되는데...

아들은 외국에 나가 있어서 연락이 안되고 일가친척도 없다.
이 할머니의 레파토리도 벌써 이 달 들어 세 번째 반복이다. 2주 전 방문에서 그 딱한 사정을 듣던 여직원이 지갑을 열어 자신의 돈 3만원을 빌려 <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 후 매번 다른 창구의 직원들에게 가 돈을 찾으러 왔노라며 잔고없는 통장을 내밀고는 그들의 동정을 기대하고 있다.
이미 이 할머니의 목적을 알고있는 창구 직원들은 역시 난감한 표정 말고는 다른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다.
결국 냉정한 대응은 내 몫이다.

-할머니...다른 손님 업무를 처리 해 드려야하니 다른 볼일이 없으시면 이제 자리를 좀...

대기석으로 돌아간 할머니는 한참동안 불쌍한 표정으로 창구의 한 여직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일처음 돈을 빌려<주었던> 여직원이다.
여직원은 시선을 피하며 업무를 보고 있다.
결국 나는 이 할머니에게도 동사무소에 가 보시라는 얘길 꺼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 여직원가 눈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을테니...보는 사람도 괴롭고 눈을 피하는 사람도 괴롭다.
할머니는 내 말에 쓸쓸히 객장을 나선다.
아직 이 할머니가 앉지않은 창구 직원이 한 명 더 있다.
다음은 그의 차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