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당분간 밖에서 좀 지내.”
담뱃불을 붙이며 그녀가 던진 말이다.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각이었다. 커튼을 투과한 햇빛이 부드러운 산광이 되어 온 방에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빛의 안개 속에서 나누었던 섹스는 늦잠만큼이나 달콤했지만, 그 여운을 깨며 갑작스레 툭 던지는 그녀의 말투는 다소 사무적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이 되돌아온다.
의미를 몰라서 머뭇거렸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꺼라 생각했었고, 앞으로도 겪을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눈빛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의 확인 일 뿐. 그것은 명백한 통보였다.
“얼마동안?”
“알면서 뭘 또 물어. 빠르면 1주, 늦으면 2주. 내가 전화할게. 어차피 <설산> 숙소에서 신세질 거잖아?”
정상적인 남녀관계라면 분노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받아들이기로한 약속이었다. 정부(情婦)의 정부(情夫)가 감내해야 할 약속.
탁자위의 재떨이를 가지러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원 없이 탐했음에도 아담하고 탄탄한 가슴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간다.
크림색이 뒤섞인 핑크빛 유두의 감촉이 아직도 내 입술에 남아있었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살짝 치켜든 고개 아래 드러나는 길고 우아한 목선. 백옥 호리병 같은 몸을 돌려 탄력이 넘쳐나는 엉덩이 아래 쭈욱 뻗은 다리로 사뿐히 걸어간다.
마음속에서 분한 감정이 일었다.
짧게는 1주 길게는 2주. 그 시간 동안 저 모든 것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소유가 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애초부터 그녀는 그 남자의 소유였다. 최근 석 달간 내가 점유하고 있다고 믿었을 뿐.
그녀를 사랑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했다.
경제적 지원이라는 거래로 맺어진 육체적 관계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특별한 조건을 내걸지 않은 젊은 남녀의 동거라는 점에서 그녀와 나의 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러므로 당분간이라곤 해도 비정상적인 관계에 밀려 난다는 것이 나를 분하게 만들었다.
“기분 나쁜 것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침대로 돌아 온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삐친 아이를 다독거리는 엄마, 혹은 큰 누나 같은 느낌.
“이 집의 모든 것은 그 사람 꺼야. 네가 나와 같이 지내려면 이 사실부터 빨리 받아들여야 해. 약속했잖아.”
알고 있다. 나는 지금껏 얼굴도 모르는 그가 마련해준 보금자리에서 그녀와 뒹굴며 지내왔다는 것을.
한 달에 한 번, 어쩌면 두어 달에 한 번쯤 그가 찾아와 머물다 갈 것이고, 그 때 나는 이 곳에 존재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 약속을 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꼭 지켜야 할 규칙이라며 강조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그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다.
나 역시 처음엔 궁금했지만 기분 좋을 일이 없는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지냈다. 그저 제법 잘나가는 기업의 오너라 중요한 비즈니스 등의 이유로 좀체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오늘 같은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완전히 놓고 지내 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이니 그저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금의 뜸을 들인 후에야 나는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짐 챙길게.”
다행히도 그 때까지 그녀의 아파트에 딱히 내 소지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소설 책 몇 권과 옷가방이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는 미덥지 않았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꼼꼼히 체크해 가며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살피고 살폈다. 한참동안 반복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나의 흔적이 그녀의 삶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나로 인해 그녀는 이 소중한 보금자리는 물론 풍족한 재정적 지원마저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다시 밤에 기대어야 하는 생활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 공간에 들인 이유가 뭘까.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나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녀를 만난 석 달 전까지는 열아홉 살이었으니 미성년자인 셈이었고, 지금도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만으로 치자면 여전히 열여덟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녀에 대한 나의 성적 욕망을 과감히 드러낸 어느 새벽의 술자리에서 시작 되었다.
그녀를 향해 품고 있던 나의 내밀한 욕망은 또래의 여자들에게선 절대 느낄 수 없는, 성인 여자들의 원숙한 매력 대해 소년들이 가지는 성적 환타지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만취했던 밤이었다. 드문드문 끊겼다 이어지는 기억들이다. 나는 어른인 그녀에게 나의 남성미를 과시해 보임으로 내가 잠자리 상대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과장된 몸짓을 동원한 허세도 떨었던 것 같다.
그따위 유치한 구애가 통하지 않을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쨌건 그날 밤 분명히 뭔가 다른 나만의 매력이 그녀를 매료시켰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던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모든 것이 서툴렀다. 당연히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이제 겨우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남자에게 어떤 경제적 성장 가능성을 발견한 투자도 아니었을 테고, 곱상한 외모라는 소리를 듣는 편이긴 했지만 여자들에게 수작을 거는 대로 먹혀들 정도로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이런 의문에 어떤 대답도 해 준적이 없었다.
오후에 우리는 압구정동의 한 초밥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뉴스에서는 다국적군의 이라크 공습이 시작되었다는 긴급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함정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힘찬 불꽃과 함께 긴 후연을 내 뿜으며 페르시아만의 상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갑판요원의 수신호에 따라 항모에서 발진하는 전투기의 영상이 되풀이 되었다.
저것들이 도달한 지점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가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초밥을 씹어 삼켰다.
옆자리의 누군가가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나는 누군가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전투기를 출격 시키지 않았음에도 퇴각하고 있었다.
일시적 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방문예정 사실을 전해들은 것만으로 거주지를 떠나는 중이었으니까.
아마 그녀에게 그 남자와 나의 가치 차이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력 차이보다도 더 클 것이다. 28이라는 나이 차이를 제외하고는 내가 그 보다 우위에 (젊음을 우위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차에 오르며 가게까지 태워주겠다고 했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했다.
“누나.”
나는 여전히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차에 오르려던 그녀가 돌아보았다.
“나는 누나에게 뭐지?”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그런 거 묻지 말랬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린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온다고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2주야. 그 후에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처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바라보며 내가 쫓기듯 물러 나온 공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 머무를 그 사내를 생각했다.
마흔여덟 살의 일본인이었고, 알 만한 사람은 안다는 기업의 오너였다.
그게 내가 아는 그 남자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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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청담동의 <설산>이라는 가라오케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 유명 의류 회사 빌딩의 지하에 위치한 그곳은 건물 바깥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하는 구조였다. 계단을 내려서면 일본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정원이 있고 석등으로 장식된 작은 다리를 건너면 출입구로 들어서는 고급스런 분위기의 업소였다.
내부는 상당히 넓은 편으로 제법 화려한 조명과 멀티비전이 설치된 스테이지가 있었고, 홀과 주방을 연결하는 통로에 작은 바(bar)가 있었다. 비지니스 등의 이유로 테이블에서 따로 자리를 옮겨 긴히 나눌 대화가 있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 된 공간 이었다.
나는 바에서 그런 손님들에게 음료나 칵테일을 서비스 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손님들이 많지 않은 날이었으니 아마도 월요일이나 화요일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아홉시를 조금 넘길 무렵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실내로 들어섰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들에게 향했다. 업소를 촬영장소로 대여해 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같이 TV 화면 혹은 스크린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미모의 소유자들이었고, 차림새 역시 평범한 직장인들이라고 보기엔 고급스러웠다.
그들 중 몇 몇은 홀에 있던 웨이터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나는 바 한쪽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실장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은 혹시 연예인인가요?”
실장은 너구리 같은 미소와 함께 내게 바짝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처음보냐? 예쁘지? 쟤네들은 다찌야.”
“다찌? 일본말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일본인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애들이니까.”
“접대하는 아가씨들이란 말이에요? 우리 가게 식구인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는데... 쟤네는 업소 소속이 아니고 별도로 합숙생활을 하거든. 그리고 관리자인 마담이 물어다 주는 손님과 계약 된 기간동안 현지처 같은 역할을 하는 애들이야. 우리 사장의 와이프가 관리하는 애들인데 그여자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요정 출신이거든. 업계에선 일본 통으로 꼽히지. 관광이건 무역이건 가릴 것 없이 인맥이 두터워. 심지어는 언론사까지 줄이 있지.”
고객들 중 일본인이 많은 것은 단순히 주변에 관련기업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실장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빼어난 미모와 능통한 일본어는 기본조건으로 갖춰야 했고 가이드와 통역의 역할 외에도 상황에 따라서는 비서의 역할까지 맡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유능함을 내세워도 그녀들의 최대가치는 결국 침대 위에서 증명된다.
결국 몸을 파는 일이 그녀들의 본업이다. 젊고 아름다운 몸을.
그녀들의 술자리가 길어지는 동안 유독 내 시선을 끄는 여자가 있었다. 사회자가 그녀의 노래 번호를 부르자 그녀는 내내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고 스테이지에 올랐다.
육감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알찬 볼륨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타이트하고 적당히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내 귀에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는 음성으로 실장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쟤가 저 팀의 에이스였지.”
“지금은 아니라는건가요?”
“지금은 은퇴 했어. 정확하게 말하면 잠정적 은퇴지.”
결혼 생활에 준하는 조건으로 주거에 차량과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고 장기적인 계약관계를 맺는다는 얘기였다.
“다찌 애들의 가장 큰 꿈이 그런 놈팽이 하나 잘 무는 건데... 그러면 거저먹는 인생이 꽃피는거야. 한두 달에 한 번씩 찾아 올 때 마누라 행세만 해주면 집생기지 차 생기지... 따박따박 들어오는 돈으로 이놈 저놈 만나면서 인생의 단맛만 보며 살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그정도 거리에서도 숏커트 헤어 아래로 드러낸 앙증맞은 귓볼에 박혀 자주색으로 빛나는 이름 모를 보석까지 선명히 눈에 들어 올 정도였다.
“저 여자는 그런 물주가 있다는 말인가요?”
“나도 본 적은 없어. 한 1년 정도 되었는데 사장 와이프 말에 의하면 꽤 잘나가는 기업의 오너라고 하더군. 신기한건 그 자식을 만난 이후로 쟤는 어떤 남자도 만나고 있지 않는다는거야. 내가 알던 애들은 잠정적 은퇴상태가 되면 오히려 더 난잡해지거든. 그런 관계가 들통나서 계약이 깨지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애들도 제법 있어. 그런데 쟤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가봐. 이따금씩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는 술자리 이외엔 어떤 남자도 만나지 않는다더라고. 그 자식이 얼마나 대단한 지원을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아깝지.”
잠정적 은퇴상태인 그녀의 <이놈 저놈>중 하나가 되고싶다는 듯 실장은 입맛을 다시며 스테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정도의 여자가 일본남자의 현지처라는 사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당시의 나는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곤 하던 술자리에서 그저 그런 여자애들을 만나 어떻게든 같이 자려고 애쓰던 일이 지겨워질 무렵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날 나는 무엇 때문에 겨우 그런 애들에게 에너지를 쏟아왔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노래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 온 그녀는 테이블의 친구들과 손짓을 섞어가며 대화를 주고받더니 방향을 바꿔 곧장 바 쪽으로 걸어왔다.
“처음 보는 삼촌이네? 새로 왔어요?”
홀을 가로질러와 내 앞에 앉으며 방긋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넬 때까지 내 시선은 롱테이크로 그녀를 포착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넋나간 표정로 그녀를 보고 있었을것이다
“너무 빤히 쳐다본다. 사람 민망하게.”.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제 겨우 일주일 조금 넘었어요..제가 누님들처럼 아름다운 여성분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좀체 없다보니 잠시 넋이 나갔었나 봐요.”
나는 사실 이런식의 너스레에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의 해소에는 이런 접근방법이 가장 적합한 수단이었다.
그녀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괜찮아요. 자주겪는 일이니까” 라는 말을 뱉는 동시에 몇 초간 혼자 키득거렸다. “첫인상부터 엄청 재수없는 여자로 보이겠다. 그쵸? 솔직히 말해봐요. 이여자 뭐야? 이런 생각했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왠지 저희 사장님께 이르실 것 같아서 침묵 하겠습니다.”
내가 웃으며 받아치자 그녀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좀 더 커지더니 다시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칫! 여기서 잔뜩취해가지고 삼촌한테 진상이나 부려야겠다.”
다찌라는 직업을 가졌었던 탓인지 원래 명랑한 성격인건지 붙임성이 좋았다.
가벼워 보이지 않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친화력이었다.
이미 1차를 거쳤다는 그녀는 그날따라 독한 술이 잘 받지 않는다며 스크류 드라이버 한 잔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얼음을 넣은 언더락스 잔에 보드카를 따르고 오렌지 쥬스를 붓는 동안그녀가 이것 저것 내 신상에 관한 것을 물어왔다.
“몇 살 이에요?”
“스물입니다.”
“열 아홉이라는 얘기네? 그 나이쯤의 남자들은 다 한 살씩 올려서 얘기 하니까.”
사실이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성인 행세를 하고 다녔으니.
“누님은 스물 넷이겠네요? 미인들은 보통 나이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려보이니까.”
“어머? 자기랑 동갑으로 보인다는 얘기?”
“에이 왜 그러세요? 그런 소리는 지겹게 들으실 것 같은데.”
“아무튼 정확하게 맞췄어. 눈썰미가 좋네? 나는 일부러 나이보다 조금은 더 들어보이게 하고 다니는데.”
“낡은 상자에 넣어 둔다고 보석의 빛이 바래는건 아니니까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어느 책에서 본 글귀였을 것이다. 그 또한 내가 쓸 법한 말은 아니었으니. 그녀 역시 무슨 연극대사 같다며 다시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인걸? 평소에 준비 많이 하나봐.”
뻔한 내용이어도 이런 식의 칭찬을 싫어하는 여자들을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식의 대화는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녀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전까지는 결코 느껴 본 적이 없는 농밀한 매력이 향수처럼 베어나는 그런 여자였다.
이후 몇 번 더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늘 자기 노래가 끝나면 바에 와서 칵테일을 마시며 나와 대화를 나누다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 때 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녀에게 끌리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연애감정 같은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일상속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횟수가 늘어났고 가까이 다가가고싶은 여자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연애대상과 다른점은 두근거림이나 설레임이 그녀가 시야에 존재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그녀를 잠정적으로 은퇴시켰다는 일본인 남자가 만들어 낸 경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떠올린다는 것은 내 시야가아닌 그의 경계 안에 존재한다는 얘기였으므로.
그녀가 돌아갈 때 마다 느끼는 아쉬움은 나로썬 다가 갈 수 조차 없는 여자를 너무나 쉽게 소유해버린 그 일본남의 경제력에 대한 패배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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