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이 길로 뛰어 들었어?”
어느 날 저녁 그저 칵테일 생각이 나서 들렀다며 혼자 가게를 찾은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글쎄요... 뛰어 들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건 뭔가 고민 끝에 중대한 결심을 세우고 일하는 사람에게나 쓸 법한 말인 것 같은데....저는 그게 아니거든요. 어쩌다보니 그냥 이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된 거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만화가가 되기를 원했었다. 내가 만약 어느 작가의 문하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만화계에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삶은 전혀 아니었다.
계획도 꿈도 없이 그야말로 막 사는 인생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녀는 쓴 웃음을 짓더니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키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삶에 찌든 어른들처럼 얘기하네...어쩌다보니 그냥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니. 자기 말에 의하면 나야말로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듣고 보니 말대로 그녀야 말로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한 삶이었다. 중대한 결심 없이 그런 생활을 선택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
그녀는 내 이야기를 좀 더 해달라고 했다.
흔히 성장기에 한 번쯤 지나가는 감기정도로 치부되는 사춘기 시절 나는 부모님과의 갈등을 순탄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내 또래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 역시도 꿈보다는 당신들이 원하는 진로와 삶의 방식을 강요당했다. 내가 선택한 저항의 수단은 문제아가 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1학년을 두 번이나 다니고도 결국 불량써클의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쫓겨났을 정도이니 이정도면 나의 저항은 상당히 격렬했던 셈이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등을 돌리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결심을 했던 것이다.
함께 어울리던 불량써클의 멤버였던 친구들과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거실 바닥에는 검정고시 합격 통지서만 던져 둔 채.
이정도면 당신들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발을 들이게 된 밤의 세계에서 처음 얼마간은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여물지 못한 머리로 섣불리 뛰어든 어른들의 세상에서 우리의 남은 순수는 어느덧 소멸해갔고, 반쪽짜리 어른 행세를 하며 밤을 살아가는 동안 꿈은 세속적 욕망에 잠식되어갔다.
그렇게 <설산>까지 이르게 된 이야기들을 일련의 드라마처럼 구성하여 떠들어댔다.
그 때까지 나는 어떤 여자에게도 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한 편으로 만들어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30여분 가까이 때로는 손뼉을 치거나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 돌아왔다.
“아휴...뭐야? 모범생처럼 생겨가지고선...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만 골라서 하며 살았네?”
“제가 모범생처럼 생겼나요?”
“응. 이런 생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늘 주위에 책을 쌓아두고 생활하는 사람처럼 보여. 그래서 물어본 거야.”
책에 묻혀 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착실한 학생으로 살아가던 시절은 있었다. 돌이켜보면 마치 지금과는 다른 인격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은 날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런 이미지로 비춰진다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이런 생활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는 말은 그녀와 어울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는 의미로 들렸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길을 잃은 아이를 바라보는 측은함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과 하룻밤 자보고 싶다는 말을 던지면서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의 온 몸을 훑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해버리고 말았다.
<설산>이 개업한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하루는 영업을 쉰다는 안내를 붙여놓고 초저녁 부터 사장이 주최하는 축하 술자리가 열렸다.
그녀와 친구들을 대동한 사장의 아내도 그 술자리에 참석했다.
앉은 자리에서 뿌리를 뽑는다는 사장의 음주 방침에 꽤나 길게 이어진 1차의 끝무렵엔 벌써 두어 명의 만취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장과 그의 아내가 돌아가고 2차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무렵 막내인 나는 자양 강장제와 숙취해소제를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있었다.
마지막 만취자의 등을 두들겨 토하는 것을 도와주고 약을 먹인 후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난 직후였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정차한 택시 옆에 그녀가 서 있었다.
“타.”
차 내엔 그녀의 친구 두 명이 앉아 있었다.
“2차 안갈거야? 가려면 우리랑 같이 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택시에 오르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녀의 친구가 기사에게 “신사동이요” 라고 말했다.
출발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가는 것 아니었나요?”
“저치들과는 1차에서 끝내는게 좋아.”
그녀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사장님이나 언니가 없으면 엄청 질척거릴게 뻔하니까. 특히 실장 그자식. 툭하면 취한 척 하고 주무르려고 지랄이야. 우리가 지들 접대하려 간 줄 아는건지.”
“다른 누나들은요?”
“걔들은 괜찮아. 그런걸 은근히 즐기는 타입이거든. 그래서 우리끼리만 나온 거니까 신경 쓰지마. 저 인간들은 걔네한테 정신이 팔려 어차피 니가 없어진줄도 모를꺼야.”
그 말은 남아있는 <설산>의 식구들에게 아무말도 없이 자리를 떠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주었다.
누군가 알게 된다면 한소리 들을 일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와 어울릴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나의 쓸모는 따로 있었다.
신사동의 한 나이트클럽에 들어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그녀들에게 접근해 오는 시시한 남자들을 막기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그녀에게 나란 존재는 이런건가 하는 생각에 착잡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설레고 들뜬 기분으로 택시에 오르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때 부터 스테이지를 뒤흔드는 음악은 내게 한낱 소음일 뿐이었다.
더 이상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테이블로 돌아와 그저 묵묵히 맥주와 양주를 섞어가며 잔을비워 가는 동안 그녀들은 몇 번이나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때마다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들의 주위를 맴돌며 접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어중이 떠중이들이나 끊임없이 부킹을 부추기는 웨이터들에게 내가 일행이라는 것을 알리는 임무나 충실히 수행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술은 그녀들이 사는 것이니 그런 역할정도 해 주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늘어가는 빈병과 함께 내 의식의 필름은 점차 편집되어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그녀가 괜찮냐고 묻는 말을 너는 괜찮은 남자라는 말로 알아들을 무렵 필름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불빛도 없이 지하 수백 층까지 급속도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탄듯한 멀미에 시달렸다.
그 짙은 어둠속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외치는 나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완전한 문장도 아니었고 명료한 단어도 아니었다. 다만 간절 할 뿐이었다.
나는 무엇인가가 내 몸을 감고있는듯한 갑갑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침대 위에서 그녀가 나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몸이라는 사실이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경대의 거울앞에 놓인 온갖 종류의 화장품으로 보아 모텔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며 그녀의 아파트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까지 와 이런 상태로 잠들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체취와 뒤섞인 온갖 향기에 정신이 아득했다. 내가 설마 그녀와 섹스를 한 것인가.
그 만취 상태에서? 만약 그랬다면 그 중요한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녀를 깨워 물어볼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를 안아버릴까. 만약 그녀가 실수였다고 말하며 나를 거절 한다면 나는 그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여기를 떠나야 하는걸까.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행동을 떠올렸지만 그녀가 슬며시 눈을 뜬 순간 그것은 무의미한 고민이 되었다.
“용감하던걸?”
약간은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에는 아직 잠이 묻어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모습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그렇게 빤히 쳐다보네...민망하게.”
“설마 제가 어제...”
“설마 뭐? 이제와서 발뺌 하려고?”
“발뺌이라뇨?”
“어쩜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니? 정말 난감해 죽는 줄 알았어.”
지워진 기억의 조각들이 순간 순간 희미하게 복원되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거침없이 주장하던 내 모습. 손뼉을 쳐가며 재미있어하던 그녀의 친구들의 모습이 교차편집된 영상처럼 떠올랐다.
적어도 내가 그녀에게 어떤 식의 행동을 했을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 온갖 터프한 척은 다했겠지. 어느 소설에서 읽었을 대사를 읊조려가며 갖은 폼을 다 잡았겠지.
술에 취한 고만고만한 여자애들에게는 먹히던 경우가 제법 있었으니
그러나 하필 그녀에게 그따위 같잖은 방법으로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녀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퍼붓던 상황도 번쩍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안 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집에 들어오기 직전의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 되었다.
이럴 때 적합한 대사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왠지 미안하다는 말은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우리가... 뭔가... 하기는 했나요?”
“친구들 앞에서 나랑 자고싶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워놓고... 걔들이 얼마나 놀려댔는지 알아? 집안에 들어와서도 나한테 환장한 사람처럼 미친듯 달려들더니 기껏 침대 위에서는 혀를 밀어넣다 말고 곯아 떨어지는 건 대체 무슨경우인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난감해하는 모습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제는 정말 너무 많이 마셔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가슴언저리에 있던 그녀의 손이 배꼽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미 한참 전 부터 단단해져 있었던 내 일부를 움켜쥐었다.
“그래도 이녀석까지 인사불성이 될줄은 몰랐거든. 응? 그런데 지금은 다 깬모양이네.”
“아... 이녀석이 먼저 깨어 있었어요.”
내 가슴위로 포개어 지듯 그녀가 엎드려 오며 속삭였다.
“그럼 나를 덮쳤어야지.바보야. 뭘 하고 있었어.”
“음...기회를 엿보고 있었죠.”
그렇게 원했었지만 정말 이런 순간이 찾아오리란 기대를 가져 본 적은 없었다. 기억이 끊기기 전 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비참함에 가깝지 않았던가.
더이상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코끝이 부딪힌다고 느끼는 순간 시럽을 듬뿍 바른 젤리같은 감촉이 내 입술을 비집고 달콤하게 밀려들었다. 이어 보드라운 온기가 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몇 번이나 엎치락 뒤치락 하며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더듬어가던 손끝은 드러나지 않던 연약함과 마주쳤고 달뜬 고백을 들을 때 때 까지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열락의 문을 여는 주문처럼 그녀의 고백이 귓가에 메아리 칠 무렵, 꿈꾸던 시간들은 현재가 되어 나는 바이올린 음률 같은 신음을 들으며 안락한 그녀의 안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곳엔 더이상의 아쉬움도 패배감도 없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가쁜 호흡 속에서 희열의 바다를 헤엄쳐 나아가는 동안 나는 온통 그녀로 젖어들고 있었다.
모든것이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잠이 들었다. 그녀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깨어난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얽혀들기를 반복했다.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저녁이 되자 단꿈에서 깨어난 듯한 서러움이 나를 엄습했다.
이 아파트를 나서면 나는 별 볼일 없는 일상 속에서 언젠가 오늘 하루를 운 좋았던 날 쯤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내 등을 두들기며 그녀가 말했다.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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