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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생각들

...

"나 직장 조만간 잘릴지도 모르겠다. 너네 회사 자리좀 있냐?"

"글쎄... 자리야 지금 당장은 없어도 현장이 커질 수록 인원이 늘어나니까 생기겠지. 잘리면 경비하게?"

"애들키우느라 모아놓은 것도 얼마 없고, 당장 잘리면 딱히 할 줄 아는게 없으니  그거라도 할까 싶어서. 일은 좀 어때?"

“그냥 네가 아는 그대로야. 정해진 근무시간 동안 허가받지 않은 출입을 통제하고 지시를 받아 위험요소를 살피고 범죄나 사고를 예방하는 활동을 하는 것. 우리는 다들 그런 일들을 한 번쯤은 경험 해봤잖아? 군대에서.”

“아니 직업으로써 어떠냐고.”

“좆같애.”

“뭐가?”

“인생을 좀먹는 직업이야.”

“어떤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못해. 원청의 지시도 받아야 되고 관리자의 지시도 받아야 하는데 두 지시가 상충되면 주체적인 판단을 미루고 보고와 또다른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 이렇게 철저하게 수동적인 자세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틈틈이 직무교육이라는 것을 받는데 거기서는 언제나 능동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하라고 지껄여대거든. 현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면 손해를 보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그런 직종에 왜 그렇게 오랫동안 종사하고 있냐?”

“먹고 살만한 다른 수단이 없어서.”

“공부해야지.”

“무슨 공부?”

“근무시간 틈틈이 책도 보고 자격증 공부 같은거 하면 좋잖아.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 같은거 따. 조금만 공부하면 돼.”

“조금만 공부해도 따는 자격증을 너는 갖고 있어?”

“나는 만약 지금 직장 관두게 되면 어디 경비회사나 들어가서 야간근무하면 널널하잖아. 그럴 때 공부해서 따려고. 어차피 경비생활 오래 할 생각 없으니까.”

“그러면 경비회사 들어가서 조금만 공부해서 딴 후에 얘기 할래?”

“왜 그렇게 반응이 삐딱한데?”

“조금만 공부해도 딸 수 있는 자격증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야간근무 하면서 공부한다는게 그렇게 생각만큼 만만한 일도 아니야. 학교 다닐 때 밤샘 공부 해봤으면 알텐데. 물론 더러는 그런 환경에서 틈틈이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고 이직 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런 사람한테 조금만 공부했다고 하면 굉장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금만 이라는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것들에 비하면 그렇다는거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야."

"난 학교 다닐때 공부 별로 안했어. 그래서인지 공부를 삶의 수단으로 여기지도 않고, 좀 더 나은 삶이라는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얘기하는거라면... 글쎄 니가 말하는 자격증으로 그렇게 획기적으로 나은 삶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

"경비원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이 인생을 좀먹는 직업이라고 니 입으로 말하니까 하는 얘기지."

"일 자체는 확실히 그래. 니가 어떠냐고 물어보니 말해준거고. 그래서 나는 니가 걱정하는 것 처럼 내인생을 그냥 경비원으로 보내고 있진 않아."

"뭘 하는데?"

"많지.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악기도 연습하고 그덕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작곡도 해."

"그런건 정말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돈이 안되잖아."

"니가 말하는 나은 삶이라는게 돈이 많은 삶을 얘기하는 거라면 니 삶을 거기에 쓰는걸 존중하니까 뭐라 평가하지 않을께. 나는 좀 더 사진을 잘 찍고 싶고, 좋은 글을 써보고 싶고,  좋은 노래도 만들어보고 싶어."

"나이 들어서 경비도 할 수 없게 되면? 뭔가 수입은 있어야 하잖아."

"글쎄... 그 때까지 이 일을 하게 되면 트럭 한 대 살 돈은 되지 않을까? 그걸로 먹고 살면 되겠지."

"그래 결국 인생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운전이냐? 자율 주행차가 오는 시대에?"

"자율주행 차에 운전직이 사라질 시대가 되면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가 밥벌이가 된다는 보장은 있고?"

"하여간 말싸움은..."

"나는 너랑 말싸움 할 생각 없었다. 이 통화의 시작이 니가 물어보는거에 대답해주는 걸로 시작되지 않았나?"

"딱하니까 그렇지 새꺄. 천하태평이 따로 없네."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한 니가 결국은 직장 잘릴 위기가 되어서 공부에 또 미래를 걸겠다는걸 가지고 나는 너를 딱하게 생각하지 않아. 내 삶이 썩 뭐 자랑할만한 삶은 아니지만 부끄러워 할만한 삶도 아니라서 후회되지도 않고. 다만 이젠 어떻게 살아도 번듯하게 내 세울만한 삶은 먼 얘기가 되었으니 그냥 하고싶은건 다 하고 살자는 생각으 로살고 있어. 너는 공부열심히 ...아니 조금만 해서 자격증따고 훌륭한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가 되어서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라 시발롬아. 끊어."

"까칠한 새끼."
 

20분 조금 넘는 통화 내용을 간추리니 결국 까칠한 새끼가 되었다.

장마보다도 잦은 비가 온다. 외곽에 뚝 떨어져 있던 이전 초소와 달리 잘 포장된 아스팔트 위에 번듯하게 지어진 사무동 위의 말끔한 컨테이너 경비실에 들어 앉아 밤을 샌다.
꽤 많은 사무실이 여전히 훤하게 불을 밝히고있다.
주차된 차량을 보아하니 최소 스무명정도의 인원이 남아 일을하고 있다. 저들 모두 나처럼 밤을 꼬박 샐 것이다.
여기나 저기나 형광등의 조도는 다를 바 없지만 삶의 밝기는 크게 차이가 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리 평생직장도 안정된 미래도 사라진 시대라지만 삼성이라는 기업의 사무실과 용역업체의 경비실에서 그릴 수 있는 삶은 그 색채나 명도가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차이들이 만들어 내는 가치들로 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노력하고, 좌절하니까...

그러니 그 밝은 세상에 살아봤던 티를 기어이 내려고 드는 녀석의 오지랍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내놈에겐 관대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경비 업계에 새카만 후배로 입문하려는 주제에 가르치려 드는 놈에겐 더욱 그렇다.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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