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죽음의 문턱에 갔거나, 죽음을 생각했거나, 혹은 오늘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
외환위기로 청춘을 깔끔히 말아먹고 서울에서 퀵서비스 일을 하던 어느 비오는 날,
지하철 공사구간의 철제 복공판 위에서 커브를 돌다 미끄러져 버스 밑으로 들어갔던 순간이나
급정차한 택시의 뒷꽁무니를 들이받고 수 미터를 날아가던 순간, 아...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건가 싶었다.
죽어도 곱게 죽기 위해 두 번 다시 오토바이를 타는 일로 벌어먹지 않겠다는 다짐속에서 강릉으로 내려왔지만
청춘의 끝자락을 갈아넣어 일 한 번 저지르자며 뭉쳤던 애니메이션 회사는 일년만에 무너졌고 나는 빈털털이 신세로 서울로 되돌아갔다.
꿈도 희망도 없는 나날이라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했기에,
뼛속까지 한기를 불어넣는 겨울 바람을 헤치며 인력시장과 노가다판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낯선 병증이 몸에 나타났다.
병원에 다닐 형편도 아니었고...검사를 받아 병명을 안다고 한들 달리 손을 쓸 방법도 없었으니 굳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증상을 검색해 본 결과 류마티스가 확실하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손이 부어있는듯한 느낌과 함께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는 조조강직... 한 쪽이 시작되면 반드시 다른 한 쪽도 대칭으로 나타나는 증상....
검색 결과는 끔찍했다...일 년 여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면 관절의 변형이 오고 걸음도 제대로 걷기 힘들어질거라고 했다.
꾸준한 약물치료와 관리가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그 시절의 내가 무슨 수로 그리 할 수 있었을까...
다만 한 가지 희망적인 내용은... 원인은 아직 현대의학으로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로 짐작된다는 구절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트레스를 버리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싶었던 일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케토톱을 잘라 손가락에 감아가며 한달을 더 버티고는 노가다를 집어치웠다.
그리고 조금 모아두었던 돈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스토리 공모전을 준비했다.
공모전에 떨어지거나 돈이 떨어지거나해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다만 더이상 어찌 할 수 없을 때... 그 때가 오면 죽자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증상이 호전 되어갔다. 결국 공모전은 떨어졌지만.... 더이상 병증은 진행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 은행의 지점에 경비원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삶도 비교적 정상에 가깝게 돌아왔다. 금전적으로야 늘 부족한 삶이었지만....
그나마도 다행으로 여기며 하고 싶은 일들 중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늙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진을 찍고 복싱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평온한 삶은 겨우 4년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적악화로 은행 측에서 내가 근무하던 지점을 폐쇄하기로 결정 한 것이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되돌아 온 나는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은행 경비원 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피말리는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산동네 언덕을 오르던 중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나를 엄습했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득했다. 맥박은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했다.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1분이 채 못되는 시간이었지만 한 시간 처럼 길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원인도 모른 채 이렇게 죽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병원에 검진 예약을 했지만 그날 밤 나는... 자는 동안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면 이 번에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포르노 영상을 삭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듯이 웃을 일이지만... 어쨌거나 오늘 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것이었다.
이미 죽어 없어진 놈에게 남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만
어쨌거나 생전의 내 은밀한 욕망의 흔적을 남들이 들여다 보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너저분한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고양이들이 조금만 힘을 쓰면 열수 있게 창문의 잠금장치를 조절해 놓았다.
생에 최초로 죽음을 상정한 신변의 정리였다. 신기하게도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가 아닌.... 그저 막연하면서도 왠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그 정도 수준이었던 것 같다.
검사결과 심장은 너무나 멀쩡했고.... 1년을 훌쩍 넘긴 지난 오늘 나는 여전히 살아서 이 새벽, 죽음을 마주했던 스펙타클했던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고 있다.
여전히 어처구니 없는 참담한 죽음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린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기대수명의 절반쯤을 넘겨 되돌아보니
내 주변에도 어처구니 없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동생이 하루아침에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거나...
멀쩡히 웃으면서 헤어진 다음날 사망사고 소식을 전해듣게 된 선배나...
심지어는 아무 걱정없이 살 것 같았던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일도 있었다.
오다 가다 만난 인연으로 동업을 시작하다 외환위기를 맞아 나란히 알거지 신세가 되었던 형이 있었다.
숱한 역경으로 점철된 어린시절을 극복해 온 삶을 자랑으로 삼았던 그였기에,
단 한 번의 실패에 무너져 술에 절은 세월을 보내던 어느 새벽,
무고한 택시기사를 살인자로 만들고 그렇게 세상을 떠날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세월호가 출발하던 밤. 수 백의 그 생떼같은 생명들이 하루아침에 차디찬 물속으로 져버릴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부패권력에 맞서던 이들이 나는 자살하지도 않을 것이며 건강 상태도 매우 좋다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으로
할 정도면...
확실히 유서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 하루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자세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할 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들어 스트레스가 많았던 탓인지... 기타연습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아침마다 다시 손이 뻣뻣한 증상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던가....
어쩌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생활 속에서 작은 고난과 마주치는 일을 반복하는 사이... 스트레스 관리 능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포르노를 지우던 그날 처럼만 잠자리에 들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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