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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생각들

언젠가는의 유통기한

안입는 옷들을 넣어두려니 옷 박스가 모자란다. 그래서 한동안 쓰지않던 여행가방을 꺼내는데 뭐가 툭 떨어진다.
포장지에서 형언하기 힘든 야릇함이 묻어나는 콘돔 한 박스. 금박 일본어로 뭔가 이것 저것 열심히도 써놨다.
아... 단박에 이 물건의 기원이 떠오른다.

동대문 종합시장 퀵서비스로 일하던 시절.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렇듯 나도 자주가는 단골 수리센터가 있었다. 자주가다보니 사장은 어느새 형님이 되어있었고, 형님이 되다보니 일이 없어도 이따금씩 들르고 술도 한 잔씩 하는 사이가 되는...

어느 날 저녁 들렀을 때 센터 사장은 금발의 한 외국인 청년과 마주서서 제품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뭔가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유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은 아무래도 중고 오토바이를 사러왔는데 사장이 신제품을 보여주니 손사레를 치고 있었고,
사장은 그걸 알고 있지만 이것 저것 중고를 가리키며 물어보는 그에게 설명을 해줄 수 없으니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있었던 상황인듯 보였다.
마침내 미들스쿨 써드 그레이드 레벨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진 내가 나서서 매장안의 중고들의 특징과 상태, 가격을 설명해주었다.
땡큐를 연발하며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가 돌아 간 후 나는 내 평생 처음으로 나의 잉글리쉬 스킬을 향해 경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와따...자네 다시봐야긋네. 영어를 급내 잘하능구마.>
<형님도 참...영어 좀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어요. 꼴랑 중학교 수준인데...>
<아니  나는 자네가 고등핵교도 짤리고 검정고시로 나왔다고 혀서 꼴통 출신인줄 알았제...근디 그게 아니었구마. 다시봤네 다시봤어.>

연신 감탄사를 내뱉던 사장 덕분에 그 날 저녁 다른 동료 기사들이 센터를 찾아 올 무렵에 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배움의 갈망에 학업의 끈을 놓지 않은 지식인이 되어있었다.
다음 날 퇴근길에 엔진 오일을 교환하러 들렀을 때 그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사갔어. 사갔어. 어제 그 외국인 학생 말이여 아까 어떤 한국 학생이랑 같이 와서 오토바이 사갔어.>
<그래요? 그 팔십만원짜리를 맘에 들어하는 것 같던데 그거 사갔어요?>
<응. 맞어. 오자마자 단박에 그걸 고르더니 사가드라고.>
<어? 그럼 나 오늘 오일값 안내도 되겠네?>
<에헤이 오일값이 다 뭐여. 저녁 안먹었지? 자장면 한 그릇 때릴텨?>

배달온 자장면 그릇을 비우는동안 사장은 책상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턱하니 내 앞에 내려놓는다.
 
<뭐에요?>
<응. 콘돔.>
<그건 아는데...왠거냐구요.>
<일전에 놀러온 친구가 준건디 자네가 써. 자네덕에 내가 센터한지 20 년만에 외국인한티 오토바이도팔아보고. 이제 우리 센터도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에 진입한데 대한 성의 표시여. 그게 그래도 일제여. 오까모도라고 급내 얇아서 안낀거 같디야. 디게 좋다두만.>
<아니 혼자 사는 내가 이걸 쓸 일이 뭐가 있다고...참내... 뒀다가 형님이나 쓰슈.>
 <어허... 이친구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나야말로 팔팔한 자네허곤 달리 쓸 일이 없네. 외려 이걸 서랍에 뒀다가 마누라 눈에 띄기라도 할까봐 부담스러워 죽겠구마.>
<환갑도 먼 양반이 엄살은...>
<거 시장 거래처에 일하는 아가씨들도 많잖여. 엔진도 스파크가 튀는지 안튀는지는 시동 걸어보기전엔 모르는거여. 일단 시동을 걸어야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달리등가 기어가등가 하는 것이제.>
<시장서 일한지가 삼년이 넘었는데 눈길 한 번 주는 애들 없습디다.>
<여튼 좀 배운 사람들은 이게 문제여. 아는게 많으니 이유도 많고 재는게 많어. 거 머시냐 내가 어디 신문에서 봉께 정작 쎅스는 배운 사람들이 더 많이 한다두마.>
<하이고오...그렇게 따지면 나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놈이요...>
<여튼 넣어두고 어디 놀러갈 때 갖고 댕겨. 사람일은 모르는거여.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쓰게 되어 있어. 언젠가는.>

그가 힘주어 말하던 언젠가를 한 번 더 들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불법 유턴을 하던 택시를 냅다 들이받고 병원 신세를 질 때였다.
문병을 겸해서 오토바이 파손 견적서를 들고 온 그가 안부 다음으로 건넨 말은 혀차는 소리였다.

<쯔쯧. 넘들 사고나서 가 보믄 마누라가 백숙도 만들어와 맥이고 음료수며 과일바구니도 한가득이고 그렇두만 자네는 그렇게 붙임성 좋고 친구도 잘 사귀는 사람이 왜 이런데는 암도 안와?>
<안알렸으니까요.>
<허긴 문병이랍시고 사내놈들만 우르르 몰려와 봐야 씰데없이 음료수나 축내고 환자 꼬셔서 술 마실 궁리나 하지. 그러니까 퇴원하면 거래처  여직원들 한테 수작질좀 부지런히 부리란 말여.>
<아이고...울엄니도 이젠 나한테 포기한 소릴 형님한테 들어야돼요? 누가 개뿔도 없는 원단시장 퀵서비스 기사한테 넘어와요?>
<얼래? 그럼 준규 마누라나 성식이 여자친구는 미친년들이여? 갸들 다 시장에서 만나서 결혼도 하고 연애질 하는거 아녀. 그리고 누가 자네보고 지금 결혼 하래? 마음 맞는 사람 있으면 마음 맞는동안 재미도 보믄서 살라는거지. 인생 뭐 있어?>
<내가봤을 때는요 준규 마누라나 성식이 여친은 눈이 삔거구요 시장에 눈 삔 여자들은 걔들이 마지막이었어요.>
<아 시끄러. 내가 저번에 준거 그거 여태 그대로지?>
<몰라요. 어디다 쳐박아뒀는지 기억도 안나요.>
<그러지 말고 꼭 몇 개씩 뜯어서 지갑에 잘 갖고댕겨. 사람일은 모르는거여. 중요한 순간에 괜히 그거 사러 댕긴다고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다가 분위기 다 조지지 말고.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쓰게 되어있어 언젠가는.>
<아니 연애라곤 새마을운동 시절 만난 형수랑 한게 전부일 양반이 콘돔 사러 이리뛰고 저리뛰고 할 일도 없었을텐데 그런건 다 어찌 알어요? 그리고 왜 갑자기 나의 밤생활을 이렇게 걱정해주는거에요?>
<딱해서 그래. 자네는 그런 험한일 하고 살아도 경우가 바르고 참 괜찮은 사람인데... 뭔가 여자 얘기만 나오믄 수그러드는게 있단 말이지. 말못할 사연들에서 생긴 자격지심 같은 거겠지만서도...멀쩡하게 생긴 친구가 저런 태도로 살다가는 정작 괜찮은 짝을 만날 기회가 와도 주저주저하다 놓치겠다 싶어서 말이지. 그래서 차라리 그런거라도 갖고 댕기다가 기회가 오면 앞뒤 재지말고 아쌀하게 하룻밤이라도 저지를 자신감이라도 갖고 살라는 뜻이여.>

그는 서울에서의 장사는 점차 수익이 줄어들어 여러 궁리 끝에 결국 고향으로 내려가 센터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새로 개업할 센터의 이름은 글로벌 모터스라고 지으라고 했고 그는 그러겠다며 웃었다.
서울에서 외국인에게 오토바이 판 집 이라고 반드시 써붙여 놓겠다는 농담과 함께.
나는 사업사업이 번창하면 해외로 중고 오토바이 수출도 해서 정말 글로벌 모터스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시 그의 대답은 언젠가였다.

여행용 가방은 그 즈음  해외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구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껏 제주도 조차도 가 본 일이 없었던 나는 언제나 풀지 않는 이삿짐 깊숙히 쳐박아 두었던 가방을 잊고 살았다.
그런 가방에 왜 이런걸 넣어두고 있었던걸까...?
그 때의 나는 이국에서의 여행에서 우연히 맞닥뜨리는 환상적인 원나잇을 꿈꾸기라도 했던걸까?
포장지에 새겨진 유효기간은 제조일로부터 6년...
언젠가는이라는 기원같은 말의 유효기간으로부터 4년이 더 지났다.
내가 그에게 빌어준 말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던가...
글로벌 모터스는 언젠가는 중고 오토바이 수출 업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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