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고양이.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사람들은 녀석들을 그렇게 불렀다.
어떻게 보자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그들의 음식물 쓰레기에 기어이 소유권을 주장 하겠다면 말이다.
하지만 길어야 3~4년 남짓한 혹독하고 불안한 자유 속에서 생존 이외의 목적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 녀석들을 도둑으로까지 모는 것은 어쩐지 온당치 않아 보인다.
충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불행을 보태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길고양이 혹은 길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인식이 점점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핵가족 시대를 넘어 바야흐로 1인 가구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사회에 고독의 그림자가 짙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어떤 통계나 관찰을 근거로 얘기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애묘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근래에 들어서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진 이유를 나름 추론해 보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일본이나 기타 선진국에 비해서는 아직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확실히 길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제법 바뀐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입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길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들이고 여의치 않은 상황일 때는 길 위에서의 삶이라도 보호 해주기 위해 애쓴다.
캣맘이나 캣대디로 불리는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때로 사람들의 오해나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부당한 처분에 적극적으로 항변하기 위해 연대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서 무엇 하나 낙관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저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길고양이들에게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나 내 주위에서 집사로 불리는 애묘인의 길로 들어선 이들의 대부분은 그렇다.
동질감에서 출발한 지속적인 소통이나 교감의 시도가 마침내 고양이에게서 이상적인 동반자의 가치를 발견케 한 것이었다.
내 경우엔 고양이를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개와 비교했을 때 복종이나 충성심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것은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한 그릇된 이해의 단면이었다.
동물적 특성을 잘못이나 경우가 없는 행동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녀석을 집으로 들이고 같이 살면서부터였다.
순간적인 동정심이 그 시발점이었지만 겨울이 시작되는 낯선 골목의 추위에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한마리가 가졌을 막연한 불안감은 내 삶 곳곳에도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렇게 대책 없이 집안에 난생 처음 고양이를 들여놓은 나는 겨울만 지나면 내 보낼 심산이었다.
그 정도면 단순한 동정심 이상의 도리는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 설 무렵, 고양이에 대한 나의 무지로 인해 녀석과 몇 번의 갈등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사람인 내가 녀석을 알아가는 것이 둘의 별고 없는 겨울나기에 도움이 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제야 인터넷을 뒤져가며 고양이에 관한 공부를 하며 특성을 알았고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나는 녀석을 내보내기가 싫어졌다.
나는 겨우내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존재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소통은 교감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나는 떨어지지 않는 감기 같은 내면의 끈적한 고독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녀석을 이해하려고 시작했던 일이 결국은 나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녀석과 나는 7년을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나는 다른 길고양이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다. 녀석들과도 시간을 충분히 들이면 얼마든지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며칠 전 길에서 만난 또 다른 새끼 고양이를 집에 들여놓았다.
이젠 서로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두 녀석을 죽고 못 사는 자매로 만들어 주고싶다.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동물도 좋다. 그 동물의 특성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통한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권해본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안정적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권력자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교감과 소통의 의미가 제멋대로 해석되는 시대에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내가 변화해야 세상도 변화 할 테니까. 소소하고 작은 사랑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래 사진은 어느해 늦 여름 삼청동에서 만난 길냥이들...
처음엔 그렇게 경계를 하던 녀석들도 한 30여분간 부지런히 작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이니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온다.
그리고 해칠 의사가 없음을 확인 한 녀석들은 금세 친구가 된다.
고양이는 그런 동물이다.
'작은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태자의 구속... (0) | 2017.03.17 |
---|---|
사흘... (0) | 2017.03.17 |
설원과 사막에서... (2) | 2017.03.16 |
천장지구 (0) | 2017.03.15 |
안부 (0) | 2017.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