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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카 직장이 바뀌고 나서 생활패턴도 많이 달라졌다. 이는 사진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야간 근무 퇴근과 함께 휴무가 시작되므로 첫날 오전의 출사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음주로 인해 이튿날도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근무지에서 그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폰 카메라로 이것 저것 찍기 시작한 것이 제법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는 횟수가 늘고 있다. 그래서 그간 찍은 폰카 사진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모아봤다. 더보기
<간이역> 함백역에서... 수천미터 아래 갱도의 끝은 더 나아갈 수 없는 생의 끝과 같아 광부들은 그 곳을 막장이라고 했다.79년의 봄...그 막장으로 향하던 협궤열차에서 폭약이 터졌고 그의 어머니는 시신조차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남편의 장례를 치루었다고 한다.그가 국민학교 입학식을 치른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날이었다.밤늦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쓰러지듯 드러누워 밤새 끙끙 앓는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그리고 이듬해... 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골짜기를 떠났다.그는 매사에 신중함과 더불어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자신의 생을 제법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이따금 엿보이곤 하는 삶의 경건한 태도에서 나는 성직자 같은 느낌마저 받을 때가 있었다.그리고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는 그 이유를 말한 적이 있.. 더보기
초복...그리고 닭곰탕 IMF와 함께 알거지가 된 채 여인숙 달방에서 아사직전에 있던 나를 서울로 끌고 올라간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배려로 나는 1년간 몸과 마음을 회복한다는 핑계 속에서 집세 한 푼 보태지 않고 거의 1년간 무위도식에 가까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밥값과 용돈은 벌어 써야했기에 이따금씩 노가다를 다니며 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값싼 밥집에서 가장 싼 메뉴를 먹어야 했는데 그것이 2천 5백원짜리 닭곰탕이었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하루 한 끼 이상을 꼭 그집에서 때웠다. 때로는 무료인 추가 밥을 잔뜩말아 한 번에 두 끼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조금씩 생애 최초 실패의 충격과 쓰레기같은 삶에서 조금씩 벗어났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