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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의 유통기한 안입는 옷들을 넣어두려니 옷 박스가 모자란다. 그래서 한동안 쓰지않던 여행가방을 꺼내는데 뭐가 툭 떨어진다. 포장지에서 형언하기 힘든 야릇함이 묻어나는 콘돔 한 박스. 금박 일본어로 뭔가 이것 저것 열심히도 써놨다. 아... 단박에 이 물건의 기원이 떠오른다. 동대문 종합시장 퀵서비스로 일하던 시절.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렇듯 나도 자주가는 단골 수리센터가 있었다. 자주가다보니 사장은 어느새 형님이 되어있었고, 형님이 되다보니 일이 없어도 이따금씩 들르고 술도 한 잔씩 하는 사이가 되는... 어느 날 저녁 들렀을 때 센터 사장은 금발의 한 외국인 청년과 마주서서 제품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뭔가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유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은 아무래도 중고 오토바이를 사러왔는데 사장이 신제품을 보여.. 더보기
... "나 직장 조만간 잘릴지도 모르겠다. 너네 회사 자리좀 있냐?" "글쎄... 자리야 지금 당장은 없어도 현장이 커질 수록 인원이 늘어나니까 생기겠지. 잘리면 경비하게?" "애들키우느라 모아놓은 것도 얼마 없고, 당장 잘리면 딱히 할 줄 아는게 없으니 그거라도 할까 싶어서. 일은 좀 어때?" “그냥 네가 아는 그대로야. 정해진 근무시간 동안 허가받지 않은 출입을 통제하고 지시를 받아 위험요소를 살피고 범죄나 사고를 예방하는 활동을 하는 것. 우리는 다들 그런 일들을 한 번쯤은 경험 해봤잖아? 군대에서.” “아니 직업으로써 어떠냐고.” “좆같애.” “뭐가?” “인생을 좀먹는 직업이야.” “어떤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못해. 원청의 지시도 받아야 되고 관리자의 지시도 받아야 하는데 두 지시가.. 더보기
<간이역> 이하역에서... 이하역 ㅡ 김명환이제 이곳에 기차는 서지 않는다 백 리 밖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손두부를 사러 오던 점방은 안노인이 죽고 문을 닫았다 깨진 창 사이로 밀린 고지서 바람에 흔들릴 뿐 흔들려도 가지 못하는 괘종시계 저편 떠나간 사람들은 어느 구비 돌고 있을까 기적소리도 없이 열차는 달려가고 떠나갈 사람도 돌아올 사람도 없는 이제 이곳에 기차는 서지 않는다-시집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아 허물어져가는 풍경 속을 서성이는 동안어느새 마음도 바스라질 것 처럼 녹슬어간다.아직 남은 생은 길기만 한데... 그리움 마저 지워버리면 내안엔 무엇이 남을까싶어씁쓸하게 돌아 나오는 길... 골목 어귀에 세월을 견디고 서 있는 폐가가 눈에 들어온다. 안노인이 죽고 문을 닫았다던, 시인이 손두부를 사러 왔던 점방이... 이 건물이.. 더보기